이재삼

전시기간

2016.07.07 ~ 2016.09.20

 

관람시간

오전10:00~오후18:00

 

전시장소

해움미술관

2016 해움미술관 특별기획전

 

해움미술관에서는 2016기획전으로 중견작가 이재삼 작가를 초대하여
현대미술의 다변적 스펙트럼속에서 작가가 구축해 가고 있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이 전시는 해움미술관에서 연례적
전시로 기획한 중견작가 초대 그 첫 번째 전시다.

이재삼 작가는 목탄이라는 평범한 단 하나의 재료로서 달빛 속에
드러나는 풍경들의 오묘한 빛과 색채의 응축을 내면의 터널로 부터 전달하고 있다.
이는 달빛 속 대나무 숲에 감상자가 서 있는 듯한, 그래서 그림의 일부가 된 객체가
다시 주체가 되는 심상적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290x360cm의 거대한 대나무 그림 앞에 서면
그림에 빨려들어 가는 듯한 압도감을 느낄 수 있으며 소나무, 대나무, 매화 등의
한국적 소재를 제한적으로 선택함으로서 그의 잠재적 풍경들을 스스로 해석해 낼 수 있다.
이는 작은 공간을 무한히 확장해 가는 작가의 웅혼한 후면을 가슴으로 받아들임과 같다.
이번전시는 그의 연작중 대나무 그림만 선보이고 있으며 연결된 대작 5점으로 구성되어있다.
전시가간은 2016년 7월7일에서 9월20일 까지이다.

 

서영희(미술평론)

 

이재삼의 회화-달빛 공간 속의 심미 체험: 自然至性을 일깨우다 ● 필자는 이재삼화가(이하 이재삼으로 약칭)의 그림들을 최근에 접하게 되었다. 글쓰기도 그렇지만, 이재삼의 그림들은 스치듯 체험하는 눈의 자극이나 몸 세포의 감각으로 느끼게 하는 사례가 아니다. 가능한 오래 두고 보고 또 보게 하면서, 조용히 좌망坐忘하는 정신적 심미 체험을 하도록 이끈다. 그가 그린 소나무, 매화, 대나무와 옥수수밭 그리고 폭포의 정경들은 한결 같이 교교한 달빛을 머금고 있으며, 한 밤의 적요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관객으로 하여금 고요히 잡념을 버리고 현실세계를 잊도록 할 만큼 그 탈속의 기운이 남다르다. ● 사실 작가의 그림 이미지들은 생각이나 의중의 표현인 사의寫意회화에서처럼 생략적이거나 추상화되어 있지않다. 목탄 가루를 첩첩이 쌓아 이룬 이들 공고한 형상들은 검정 숯가루의 속성 덕분에 시각적으로 어둡고 강렬할 뿐 아니라, 실사實寫의 정밀함으로 묘사된 탓에 그 형태의 구체성도 매우 높다. 그래서 언뜻 보면 그리자이유grisaille식 묘기의 사실주의 회화로 여겨질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머릿속을 맴도는 이미지들은 관객을 그림 표면의 세부 형상에만 머물게 놓아두지 않는다. 순연하게 그 너머로 이끌면서, 형상과 그를 둘러싼 검은 공간, 헤집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깊고 어두운 공간의 기운氣을 마음으로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송, 죽, 매의 형상들과 그 주변 공간의 긴장된 관계 속에서 촉지할 수 없는 기운의 긴 여운을 느끼기 시작하면, 이제 작가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할 준비가 된 것이다.

필자는 이재삼의 작품을 대하면서, 소재와 이미지에 대해 혹은 목탄이란 소박한 재료에 대해 흥미를 느끼기보다 작가의 예술관, 거의 정신적 심미의 경지라고 할 작가의 ‘의경意境’에 대해 더 큰 흥미를 느꼈다. 이러한 선택은 물론 개인적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먹색과 다름없는-차이가 있다면, 목탄가루는 화면 안으로 스며들지 않고 화면 겉에 쌓인다는 점과 그 가루입자들 때문에 질감과 광택이 먹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목탄가루의 검은 빛과 송, 죽, 매의 소재들로 말미암아 인지되는 저 관념적 심미성과 자연관 그리고 우리에게 오래 전부터 친숙한 달빛月色의 상징성이 작가의 회화를 근본적으로 밝혀주는 요소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한국 전통 문예에 내재된 자연관을 얼마만큼 참조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 그의 회화의 화가의 송, 죽, 매 그리고 폭포는 달빛 및 대지의 음기와 조화를 이루는 수직상승의 힘찬 양기를 띤 기운이라고 덧붙여도 되겠다. 그런데 이들 산천초목은 눈부신 태양빛 아래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형상들이 아니라 교교한 달빛 아래서 ‘꿈’ 같이 드러난 형상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앞에서 말했듯이, 형상과 그 주변 공간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촉지할 수 없고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운, 그 언외지의言外之意의 노경老境한 경계의 氣를 주목하는 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동양 고전에서 예술작품을 설명할 때는, 표현 장르나 구체적 기법보다 예술가 개인의 기풍과 사상 그리고 심미의식을 중심으로 다양한 풀이를 개진해왔다. 마찬가지로 이 글도 그러한 의경론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래서 작가의 자연 대상과의 합일인 물아일체에서 비롯된 정신적 심미 체험을 세속적인 지知에서 벗어난 고요한 마음의 체험으로 파악한다. 마음心은 생각하고 감각하는 주체이다. 몸을 절제하고 마음을 닦으면 절로 이치理가 밝아오고, 그러면 마음과 이치理가 일치 ‘心與理一 ‘을 이루게 된다. 이 心與理一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 사유와 존재의 일치, 주체와 대상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퇴계 이황은 이 심여리일이 이루어지면, 학문에서나 예술에서 진정한 기쁨인 眞樂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작가가 ‘달빛 ‘과 ‘산천초목 ‘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 속에서 궁극적(초월적)인 기운과 이치를 느끼고 추구하면, 자연은 미학적인 공간인 동시에 고상한 품성을 함양하는 공간이 된다. 그러기에 허령한 마음 즉 깨끗하게 텅 비고 신령한 마음으로 자연을 지각하며 심미적 체험을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작가가 그림에 진정한 가치를 둔다면, 바로 여기에 있으리라 여겨지며, 관객인 우리 역시 이 점을 알고 감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작가가 송, 죽, 매의 자연 대상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앎을 이루는 치지治知의 한 방법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내면주의적 성격이 강한 작가의 작품이 또한 자연과 자신을 들여다보는 수기修己적 인식의 과정으로 생각된다고 말하려 한다. 이 수기라는 논제는 성리학이 강조한 경敬-정신적 수양 개념-이라는 포괄적 명제와 관련이 깊지만, 여기서는 글의 짧음과 필자의 학식 부족으로 깊이 있게 개진할 수 없다. 단지 작가 주체의 수양이 심미 창조의 전제이자 관건이 된다고 보는 한에서 부각시켜보려 하는 것이다. 작가에게서 돋보이는 실로 정밀하고 성실하기 그지없는 사실 묘사의 과정은 자기 수양의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제작법은 작가에게 절실한 마음 표현을 위한 정칙이자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가는 길道이 된다. 하지만 수기적 인식 때문에 작가의 제작과정이 순수한 감정 표현을 억압하거나 긴장된 엄숙함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은 결코 메마르지 않고 도덕적 교훈에 얽매여 있지도 않다. 은은한 달빛 속 나무들은 한가로이 우리 눈길을 사로잡고 무아지경에 이르게 하며,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게 한다. 마치도 존재 근원과의 만남- ‘心與理一 ‘-을 통해 알 수 있는 저 궁극적 즐거움을 작가는 누구보다 아낌없이 체현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작가의 달빛 그림들은 어둡고 고요하다. 그 어둠은 자연의 본래 모습인 불가해하고 적요한 텅 빔의 공간-天地玄黃의 공간-을 암시하며, 그 공간을 비추는 달빛은 어둠 아래 잠재된 생명의 기운을 밝혀낸다. 달빛이 어둠 속 물상들을 감싸며 혼연한 일체를 이루면, 산천초목은 이 합일을 통해 여여하게 생동하는 기운을 흘려보낸다. 작가는 이와 같이 자연이 주는 흥취인 山林至樂에 흠뻑 빠져, 자연과 무아지경으로 하나 되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퇴계가 ‘일어날 줄 모르고 밤 깊도록 앉아’ 매화를 완상하며 시작詩作을 했을 때도, 이와 같았으리라 여겨진다. 작가의 자연 체험이 이처럼 그림 안에서 깊은 내면 의식과 일치된 채 나타난 덕분에 관객 역시 그의 그림들 앞에서 인간 본성이 자연지성自然至性임을 깨우치는 미적 체험을 할 수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달빛 속 산천초목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내지는 주변 공간 너머에서 지각되는 신령한 기운-이 기운을 묘사하기 위해 작가의 리얼리즘의 형식미는 성립된다-의 본연은 과연 무엇인가? ● 달빛을 더듬고 그 빛에 취하며 그 빛의 울림에 먹먹해하는 작가-그의 그림 앞에선 우리 관객도 마찬가지다-의 자연 합일은 ‘꽃향기 옷에 가득하고 달빛은 몸에 가득’ 하다고 한 퇴계의 자연 합일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자연지성의 본성으로 지각하게 되는 저 공간 너머 기운의 본래 근원은 한마디로 요약해서 그러한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전제해주는 性 즉 理이다. 理는 자연과 인간 둘 사이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화해하게 하며, 인간 본성인 자연지성을 일깨우고, 인간과 자연의 기운을 상호 조화롭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모든 존재와 기운의 원인인 것이고, 지각하고 사유하는 인간 주체의 마음을 주재하는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라면, 이제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달과 그 빛을 반영하는 산천초목의 형상들은 자연스레 그리고 무위롭게 理의 기운을 비추는 존재들로 이해가 된다. 그리고 달빛은 어두운 공간을 가르는 맑은 정신의 상징으로, 송, 죽, 매와 폭포의 자연적 속성은 세속의 때에 물들지 않는 고결한 정신-퇴계는 이를 절개라고 표현했다-의 상징으로 파악이 된다.

이재삼 작가가 표상해내는 자연 이미지들, 달빛과 송, 죽, 매는 우리 고유의 문화적 감수성으로 혼쾌히 소통하고 수용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그림 앞에서는 누구든 세속적 지식에 가로막힘 없이 감정이입하고 몰입할 수 있는 장점에 가까운 특성이 있다. 그런데 작가의 정밀한 묘사와는 대조적으로 낮은 명도의 어두운 화면과 짙은 목탄 채색은 그의 의중이 대상 자체에 대한 즉물적인 재현에 있지 않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러니까 관객이 대상을 어떻게 경험해야 할지, 가령 단순한 시각적 경험에 그칠지 아니면 정신적 심미의 차원에서 경험할지를 선택하도록 한다는 말이다. 만일 그 작품이 달빛에 비친 소나무라면, 맑고 은은한 달빛과 어우러진 소나무의 아름다움과 달빛 아래 어두운 공간의 정취 및 기운을 느낄 것이요, 이 흥취와 더불어 정신적 사유를 하게 된다면, 인간의 자연지성을 회복시켜주는 자연 합일에의 성찰과 이를 이끄는 근원적 이치인 성즉리性卽理를 직관하는 경험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관객이 그의 작품 앞에 서서 적극적인 사유를 실현하지는 않을 터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작가의 그림 속에서 달빛과 산천초목을 빌어 정감 있게 표현된 心意를 교감하고 즐길 수 있다면, 또는 어둠 속에 빛나는 물상들을 대하는 작가의 마음과 자연의 경계가 서로 만나고 있음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작품이 우리의 정신적 삶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라고 확신한다. ●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금 퇴계의 감성이 짙게 뭍어나는 자연관을 담은 시 한 수를 덧붙이고자 한다: “달은 차갑게 못에 비추고 집안은 고요한데, 그윽한 방안에서 조용히 (달빛의) 비고 밝음을 즐긴다.” (『退溪先生文集』 중 卷1의 시 “秋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