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 안재홍

전시기간
2017-07-20 ~ 2017-09-27

전시시간
10:00~18:00

전시장소
해움미술관

2017 해움미술관 기획전시 <선과매체의 조응>

김은주, 안재홍 작가가 참여하는 이번 전시는 장르와 기법이 확연히 다르지만
선을 긋고 구부리는 선형의 조형형식, 이미지와 작업관이
상통하다는 점에서 이를 교점으로 ‘조응’이라는 주제로 기획한 전시이다.

김은주 작가는 연필 하나로 선긋기를 반복하여 흑연 속에서 솟구치는
평면 드로잉을 보여주고, 안재홍 작가는 구리선을 감고 구부린
동선다발을 통해 3차원에서 수행되는 공간드로잉을 보여준다.

김은주 작가는 부산, 안재홍 작가는 화성으로 두 작가의 간격과 환경은 다르지만,
두 작가의 작업관은 선을 통해 자라고 완성된다.

선적 드로잉을 통해 드러내는 자전적 고백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탐구를 보여주는
두 작가의 드로잉 미학을 이번 전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심희정

끌어당기다, 김은주의 창조적 작업에 대한 소고 ● 종위위에 연필(pencil on paper). 이보다 간결하게 김은주 작업의 특성과 드로잉의 미학을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소설이나 시(詩)가 문법과 문체를 오가듯 드로잉 또한 곡선과 직선, 그리고 약간의 톤(tone)이 허락된다. 그러나 작가 고유의 개성이 문체와 시어를 좌우하듯 감각적인 관찰과 이를 따르는 손의 수행이 합쳐지지 않으면 드로잉을 잘 하기란 어렵다. 1990년대 김은주의 작업은 종이와 벽지 그리고 미술가의 단촐한 도구인 연필과 크레용으로 첫선을 보였다. 자신과 타인을 연결하는 기표는 인체였다. 눈과 손이 반사 반응에 가까울 만큼 직관적으로 대상을 포착해내는 인체드로잉은 미술가들 사이에서도 까다롭게 여겨진다. 신체를 통해 살아 있는 존재의 깊은 내면과 특성을 소환하는 작업은 사회적 격동과 맞물렸고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의 출발선이었다. 느슨함을 허락하지 않는 급격한 곡률, 바싹 마른체로 콤파스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신체 형상을 떠받히는 선들은 동세(movement)를 위한 골조가 되었다. 강인함을 붙드는 관절 마디마디를 비롯해서 몸통을 가득 메운 용수철 같은 충동의 선들은 ‘변이’와 ‘변형’의 찰나를 맞은 격동의 순간과도 같다. 「얼굴」(1995) 연작에 들어서 생명을 이끄는 강렬한 에너지는 마치 잔혹극에 등장하는 괴이한 가면에 숨을 불어넣었고 어찌 보면 비극의 동력 같은 동적 활기는 날카로움과 섬세함, 그리고 예민함과 기괴함이 표현된 외상과 증상의 상으로 이어졌다. ● 1997년 이후 그 역동적 힘과 운동은 마음으로 내화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호흡에 들어찬 들숨의 차오름과 날숨의 풀어헤침이 리듬으로 이해되었을 때, 그녀의 평면은 열리고 닫히며, 비우고 채우는 여유를 가졌다. 2002년의 작업에서 몸에 대한 그녀의 깊이는 힘을 연결하는 운동, 그러한 운동이 자유로운 미정형의 방향을 띄었고 화면 안으로 들어선 유기적 질서는 기막힐 정도의 구조적 배치를 선사한다. 몸통은 언제라도 구르고 말릴 듯, 포개지고 엎어져 마치 자궁 속 아이의 몸짓이 뛰노는 유동적 공간이 된다. 이들을 지나며 작가는 선긋기를 완벽하게 체화 했다. 이제 공간은 무의식의 장소가 되었고 선긋기 행위는 명상과 수행의 의미가 자리했다.

내 그림 이전에 내 속에 존재했던 것들 그리다 보니 하나씩 내속에 발견된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고민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애써 고민하지 않는다. 진짜 그림은 그 형상을 뚫고 진정성으로 나에게 다가옴을 안다. (김은주-, 전시도록 p.66, 갤러리 로얄,서울, 2013) ● 이제 ‘조형’, 즉 드로잉은 형상을 솟구치게 하고 떠오르게 하는 무의식에 의탁한다. 무엇을 만들려는 자신의 의지를 넘어서 체화된 행위가 소환한 것은 사랑이었다. 「바다」(2004)는 모태적 기원, 태어나서 사는 곳, 삶의 장소와 시간의 관계를 그린다. 사밀한 개인의 기억 김은주 자신에게 끼친 특정한 기억의 파장들을 되돌아보는 바다는 삶의 터, 그 안에서 영롱하게 맺히는 인간의 본성을 사랑으로 동화하고 솟구치는 바다의 일렁임으로 가시화된다. 최근까지 작업을 꿰뚫는 ‘역동’, ‘리듬’, ‘호흡’과 같은 것들은 생명의 작용 가운데 형상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변형’ 즉, ‘모르포시스'(morphosis)를 연상케 한다. 생물학적 용어인 모르포시스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변화하는 특성이며 존재적 상황 내지 숙명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의 힘은 결국 선드로잉이라는 정태적 특성을 색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파장이 다른 빛 혹은 특정 파장에 대한 반응으로 식물의 형태는 변화한다. 이를 ‘크로모모르포시스'(chromomorphosis)라고 한다. 시야를 메우는 회색톤의 엄청난 사태를 색으로 보아야 할까? 흑연색(한자로 흑연색이란 단어가 있으나 영어는 없다.)이라고 해야 할까? 근대 이후 새로운 물질로 등장한 흑연은 진흙을 썩는 비율에 따라 단단함의 정도가 다르지만 흑연심에 가해진 손의 압력에 따라 다양한 모노톤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가늘고 깨끗한 선 드로잉을 위해 만들어진 흑연심은 김은주에게 선을 그리는 차원을 넘어 색 차원으로 이동한다. 종이결에 빼곡하게 박히다 못해 곱게 부서진 흑연 가루는 그녀의 힘에 의해 종이와 하나가 된다. 흑연 가루를 박힌 무른 종이결에 가해지는 지속적인 선의 압력은 미세한 굴곡을 만든다. 칠해진 면적의 방향과 굴곡을 따라 얹혀진 흑연 가루들은 조명에 따라 빛 산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러한 산란이 우리에게 잠자리 날개를 볼 때 일어나는 약간의 빛착란을 만든다. 몇 걸음이나 고개를 움직일 때 마다 방향에 따라 우리는 어떤 색을 발견한다. 옆의 누군가 “무슨색이야?” 하면 “은빛, 푸르스름, 금색이 획 지나간 것 같은데 너는?” 당신은 머뭇거릴 수 있다. 작품의 색을 분명하게 명명할 이름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색에 대한 관념을 탈피한다면 색채는 변한다. 내가 ‘은빛 바다’를 본 것처럼, 당신이 “붉은 꽃입니다. 혹시 정열의 꽃 레드?” 가 이미지로 일어나는. 그녀의 그림은 우리를 정서의 색으로 물들게 한다.

 

김성호

탈주하는 선과 덩어리 몸으로서의 ‘나’I. 나를 본다 – 실존적 자아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된다. 내적 투사의 대상으로서의 사물도, 소통 주체로서의 타자도, 존재 확인을 위한 지평으로서의 세계도 나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없으면 사랑도, 예술도,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것이란 이 세계 속에서 아무 것도 없다고 할 것이다. 살아 있음을 확인케 하는 이러한 ‘실존적 자아 인식’은 안재홍의 작업에서 가장 기본적인 출발 지점이다.

“나에게 있어 작업은 ‘나를 본다’에서 출발한다. 존재론적인 나의 삶, 현실 속에서 자의나 타의로의 속박, 그 속에서 꿈꾸고 있는 나 자신을 작품화한다.” ● 그렇다. 안재홍의 작품 「나를 본다」에 드러난 주체적 인식은 자신의 현실 속 개별적 존재라는’실존적 자아’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그녀는 누구의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선생으로서 끊임없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주체로 살아가는 ‘사회적 자아’의 존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안재홍’이라는 단독자로서 살아가는 ‘본래적 자아’라는 실존적 주체이다. 단독자, 혹은 개별자라고 하는 ‘타자와 대치될 수 없는 실존’에 대한 인식은 현실 속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실존 인식은 대개 소외, 낙망, 절망들로 점철되어 있는 현실로부터 생명력을 얻는다. 그곳에서 꿈과 희망 그리고 생의 의지와 같은 ‘절망적인 현실을 타계하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대는 까닭이다. 안재홍에게서도 다를 바 없다. 조각을 전공하고 대학을 졸업한 안재홍은 결혼과 육아로 작업의 공백기를 가지게 되면서 단독자로서의 실존적 주체에 대한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즉 잠시 망각했던 예술가라는 단독자로서의 안재홍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작가로서의 삶을 잠시 접고 육아에 전념하던 한 때를 떠올린다.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바람 부는 날의 풍경을 창문 밖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온몸으로 바람을 막아가며 떨며 서 있는 한 그루의 느티나무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예술 창작을 지속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비루한 현실, “이러다가는 아예 작업 자체를 못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는 좌절의 끝에서 비장한 삶의 의지와 욕망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안재홍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상(像)은, 그러한 면에서 비유적으로 말해, 소외, 낙망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흘렸던 눈물과 함께 벼랑으로 추락했던 절망의 이슬을 먹고 자라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것을 가히 내적 주체에 대해 성찰하고(나를 보다) 어둠과 낙망으로부터 성장하는(자라다) ‘단독자로서의 실존적 주체’라 부를 수 있겠다. 그것은 어둡고 음습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밝고 희망찬 미래를 향하여 탈주하려고 시도하면서도 끝내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주절거리는 독백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푸념이기보다 작은 희망에 가깝다.

“나의 작업은 선을 통해 흐르고, 자란다. / 한 덩이의 몸에서도 한 올 한 올이 생생히 살아 있기를 바랐고, / 작업이 진행되면서 선적인 요소가 더욱 큰 의미로 작용된다. / 삶의 많은 시도와 시행착오로 그어진 흔적들이 / 무수히 많은 선으로 남아있다. / 마치 여러 갈래의 길이 오가는 발길에 의해 그어지듯 / 의지를 품고 자라 뻗어 나아간다. / 몸의 굴곡을 따라 자라며, / 줄기는 핏줄과도 같고 욕망을 키워주는 강인한 힘줄이기도 하다. / 자연과 벗한 작업 환경 속에서 시선과 온 마음을 사로잡는 나무들이 있다. / 내 속엔 생각의 갈래들이 서서히 자란다. / 선들의 엇갈림과 뒤엉킴 속에서 마음이 자라 나무가 된다. / 나무가 되고 숲이 된다.” (안재홍 작가노트)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