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 <카타바시스> 김명숙 초대展

해움미술관에서는 지역문화예술플랫폼의 일환으로 《카타바시스:下降》 김명숙 초대전 이 개최된다.

2010년 사비나미술관에서의 《The Works for Workers》, 2013년 갤러리 담에서의 《영전展》 이후 6년만에

개최되는 이번전시의 부제인 카타바시스는 하강·후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며 작가가 이번연작을 공부하는 동안의 정신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제목이다.

영겁의 둘레와도 같이 켜켜이 쌓아올린 선들과, 축적되고 응축되어진 색 속에선 한줄기 빛이 드리워진다. 미지(未知)의 심연 속에서 조우한 작가의 작품은 생경함과 추상성을 넘어 타자화 된 나를 마주하고 존재적 의미를 찾는 사유의 여정으로 여러분을 이끈다.

 

[반환점이 없는 여정] 글 중에서

 

다소간 낯선 ‘카타바시스’는 기독교에서 나오는 용어지만, 동양의 사고에서도 발견된다. 샤머니즘에서 무당은 삼계(三界)를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는 존재이며, 특히 하계에 내려 갔다옴으로서 보다 큰 능력을 획득한다. 궁극적으로는 다시 돌아온다는, 심지어는 비상한다는 동서고금의 신화적 귀결은 화해와 치유의 서사에 아로새겨져 있다.

빛이 기원하는 곳, 또는 사라지는 곳이라는 상상을 야기하는 ‘카타바시스’전은 여기에 있는 타계, 내 안의 타자에 대한 감각을 고양한다. 타자와의 대화는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서 다시 찾는 역설적인 과정이다.

김명숙의 작품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위반하여 돌로 굳어버리거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신화들을 떠올린다. [인물] 시리즈는 에오르디케의 신화처럼, 천재일우의 기회를 실수로 잃어버린 이의 회한에 가득 찬 모습이 담겨있다.

그림을 생리적 현상이라고 간주하는 작가는 따로 스케치를 해본 적이 없고, 물감을 을 생리적으로 분비되는 체액 그 자체로 대하는 듯하다.

작가의 재능과 의지, 내면의 생리상태 외에 운 또한 필요한 작업들은 심신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한 류의 작업은 도박과도 같다. 스팅(Sting)의 노래 [Shape of My Heart]에서 도박사의 카드놀이–“He deals the cards as a meditation, to find the answer, the sacred geometry of chance. The hidden law of a probable outcome” 여정

 

김명숙의 작품은 신화적, 예술적 인물, 동식물 등이 다양하게 등장하지만 변주된 자화상처럼 다가온다.

이번 전시에 붙여진 ‘카타바시스(katabasis)’라는 부제는 지상의 빛을 뒤로 하고 심연으로 향하는 여정을 보여준다.

작가는 광원을 잃은 채 자신의 목소리만을 다시 반향하는 거대한 동굴의 암흑 속에서 빛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근 10년 가까이 계속하였다. 이 외부 없는 내부는 내적인 투쟁의 장이 되었다. 작업실 책상을 호위병처럼 에워싸고 있는 책들은 이러한 투쟁의 동반자이다.

 

작업실 여기저기에 붙인 빛바랜 메모지에는 작업하면서 매번 되새기려는 발췌문들이 적혀 있다. …“Prowess of floweres 꽃들의 무용(武勇)”, “美는 단지 만남일지 모른다. 장인의 사슬, 거대한 긍지, 거대한 복종이 어떤 지점에서 교차하는”, “그림은 ‘이미지의 역사’로 평준화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예술의 역사’로 격상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림은 도상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최초의 몸짓으로 되돌아가는 해석학을 원한다.”… 가독성은 없지만 손수 필사한 메모지들에 어떤 내용이 적혀있든 그 시간을 그렇게 보낸 수행성이 중요할 것이다. 책 속 타자와의 침묵의 대화를 통해 그 중 일부는 작품의 제목으로 주제로 발전되곤 한다. 타자와의 대화는 무명의 할머니부터 작가에게 등대가 되어 주었던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카라밧지오, 렘브란트, 터너, 모네, 밀레, 베르메르, 고야, 루시앙 프로이트, 베이컨, 캐테 콜비츠 ….

 

김명숙의 관심을 끄는 인물들은 자신을 이끈 회화의 거장들 뿐 아니라, 2013년 영정을 소재로 한 전시(17회 개인전, 담갤러리)을 촉발시켰던 한 할머니–청주 산막리 작업실 자리의 전 주인으로 그 자리에서 60년 이상을 살았으나 서울로 이주한 후 자살함–부터 살인혐의로 체포되어 신문에 실린 이들까지 광범위하다. 그러한 작품들은 특정인의 얼굴의 재현이라기 보다는 타자되기의 과정을 위한 매개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그러한 타자들은 수난자나 수행자로서 작가에게 감정이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작품에서의 얼굴은 살아있는 것이든 죽은 것이든 ‘이안과 피안의 경계에 다다른 최후의 얼굴, 적멸의 얼굴’(김명숙)이다.

 

예술은 자신의 원초적 조건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순간 현대에 의해 극복되었다고 믿어졌던 종교를 만나게 된다. 카프카는 ‘자신의 삶이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고, 그 문학을 기도의 형식이자 구원의 수단으로 여겼다’는 맥락에서의 종교성을 말한다. 1976년도판 금성출판사의 세계미술 문고는 작가의 오랜 미술관이다. 작가는 문고판의 희미한 인쇄물에서도 빛을 본다. 그 문고판에서 본 밀레의 농부들은 시지프스적 존재로 되살아난다. 김명숙의 버전인 [밀레공부(키질하는사람)]에서 키질하는 농부는 ‘곡식 낱알들이 빛 알갱이가 되어가고 키질이 무도가 되어갈 때까지’(김명숙) 키질을 수행하는 수행자로 나타난다.

 

관객을 향해 마주한 심장에는 인물이 내재되어 있다. 분해되거나 타들어 가는 마음/정신을 환유하는 심장/뇌는 고뇌하는 인물이 내재해 있다. 베로니카의 손수건처럼 바탕에 상처로부터 흘러나온 채액이 배어든듯한 장기는 정신의 고통과 육체의 고통을 일치시킨다. 양쪽으로 펼쳐지는 형상은 빛을 매개로 한 추락/비상이라는 작가의 주제와 연결하면 날개처럼도 보인다. 그것들은 날 수 없는 묵직한 날개, 다치고 피흘려서 비상할 수 없는 날개이다. 자신 안의 자연을 감지하는 이에게 자연은 대상화, 도구화될 수는 없다. 내 안에 나무가 있었듯이, 타인들의 얼굴에도 자신이 있다. 이러한 타자되기는 형상이 있지만, 재현은 아니다. 작품 속 여러 겹으로 횡단하는 선들은 무엇인가의 확고한 재현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와중에 있다.

 

– 이선영 평론가 –

평론전문: http://www.daljin.com/column/17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