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 성민우,전경선
2018.4.26-5.17
opening 5.3 6pm
2018 해움미술관은 ‘탈 주체화’ 대 주제 아래 네 번의 기획전시가 준비되고 있다. 네 번의 기획전은 ‘주체’라고 규정지어지는 것들에 대한 전면적인 재성찰과 타자의 시선에서 색다른 주체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첫 번째 기획전시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_Non-human All too, non human』 전시는 Ⅰ.관계적 자연 Ⅱ.자연의 촉각 두 섹션으로 나누어 김희경, 성민우, 전경선 세 작가의 생태주의 미학(Ecological Aesthetics)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근대 이후 인간들은 모든 문명의 원인을 기술과학에 두었고, ‘인간중심주의적’ 가치판단 기준을 내세웠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니 이성적인 동물이니 오래된 정의 역시 이러한 관념의 산물처럼 보인다. 만물의 척도로 서게 된 인간은 비-인간으로 간주되는 타자들 사이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을 정당화 하며, 이분법적인 대립 항 속 반(反)생태적 입장을 취했으나 산업혁명의 폐해로 각종 환경문제가 제시되면서 60년대 후반부터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예술의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자연 환경에 대한 미술행위의 방향은 대체로 인간이 중심에 서서 환경을 관리·보호한다는 환경 윤리적 태도와 자연에 대한 태도를 전면적으로 재고하고 생태 연관관계를 근본으로부터 내재화 시키고자 하는 생태론적 입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생태를 뜻하는 ‘ecology’와 경제를 뜻하는 ‘economy’ 는 공통된 어원인 eco(에코)에서부터 온다. eco의 어원은 그리스 어원인 oikos (‘가계(家計)’ 또는 ‘혈맥’)에서 출발하며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체, 생명연관 의미와 더불어 생물학 또는 경제학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즉 네트워크와 유사한 관계망이며, 상호 관계 없이는 어떠한 개체도 독자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관점이다.
성민우 작가의 섬세하고 다층적인 풀그림 인물화는 풀의 형상으로 인간을 형상화 한다. 척박한 땅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의지하는 풀의 군집은 인간사회를 투영하며, 작가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유기적 순환관계 안에서 서로 생명의 줄기를 공유하며 상호적 네트워크가 연결됨을 보여준다.
전경선 작가는 환조와 부조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조각이 형성되는 또 다른 지점을 예시한다.자유자재한 변태와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은 자연과 인간, 현실과 이상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불투명한 공간(space)으로 이끈다. 무의식 속의 여행은 자연의 존재성을 내재화 함에 따라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적 관계를 해체하는 치유의 공간이다.
김희경 작가는 전통 소재이자, 자연의 소재인 한지로부터 근원적인 자연의 형태를 찾는다.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숭고한 색감, 생명이 잉태하는 듯 강한 에너지는 여러 번 한지에 풀을 먹이고, 물을 들이 듯 안료를 반복해서 칠하는 작가의 조형적 감각 에서부터 비롯된다. 작가의 우주론적 자연관은 무한히 확대되며 자연과 인간이 합일되는 순간, 생명이 피어나는 기운을 전달한다.
세 작가가 보여주는 자연에 대한 예술적 접근은 예술작품이 창의적 인공물의 생산이 아니라 모종의 공동체들 간의 회복이다. 작가의 조형언어를 통해 예술의 기호에서 자연의 ‘흔적’이 새겨져 있고 우리는 그 흔적을 찾아 내고, 해석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공생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전시는 인간과 비인간(non-human)의 구분,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non-living)의 구분에 대한 가치론적 접근을 통해 탈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은 자연과 상호 연관되어 있고, 상호 의존하는 존재로 그 어떤 분리된 요소들로 환원될 수 없는 통합된 전체로 바라보고자 함이다. 정신과 몸의 이원론적 분리를 넘어서, 예술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신체적 교감을 이루어 내는 것은 베이트슨이 말하고자 하는 마음의 생태학 (an ecology of mind)을 실천하는 단계일 것이다. 들뢰즈는 우리는 유일하게 예술의 기호를 통해 자연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이미 인간은 기술문명 속에서 기술을 통해서 자연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있지만 전시를 통해 인간과 자연에 대한 본래적 관계를 회복하며 그 간극을 최소하려는 태도로 바라보고 싶다.